07.6/2-6 중국관광 및 백두산 등산,4박5일간,산행기.
첫날 6/2 부평 시장역(08:40-09:10)-인천공항(10:00-수속및 비행기탑승12:00-13:00 시차로14시)-대련(14:40)-심양(19:45)-서심주점(21:00)-야경 및 고량주(21:30-23:00)-서심주점 호텔(瑞心酒店 23:30)숙식
둘째날 6/3 (06:00 기상-조식06:50-07:30)-청나라 황궁 관람(08:30-09:30)-심양 요금소(09:50)-무순(10:15)-헌강 따라 통화 도착(14:15)-메아리(美阿利) 중식(15:00)-통화출발(15:10)-무송 백산경계(17:32)-송강하(18:30)-재래시장(19:30)-식사(19:40-20:30)-휴식 및 취침(22:30-06:00)
세쨋날 6/4 기상 및조식(06:00- 06:45-07:20) 송강하출발(07:30)-송강하 요금소(07:40)-장백산 서파입구 도착(08:20)-장백산 입구 출발(08:35)-백두산 서파 화강암 계단(1342단) 밑 도착(09:22)-백두산 서파 시작점 경유 마천루봉 도착(10:00)-서파시작점(10:10-20)-장백산 입구 돌아옴(11:10)-금강 대협곡(11:15)-장백산 대협곡 주차장(12:05)-장백산 입구(12:40)-송강하(13:40)-식사(14:30)-통화 식당(18:10-식사19:00)-호텔 東山賓館(19:30-21:00)-야경 및 슈퍼(21:10-22:30-야식 및 고량주(140원 52도23:30-취침)
네쨋날 6/5 기상 및 조식(06:00-06:40-07:20)-통화 출발(07:30)-집안(集案)시 옥녀봉 요금소(08:50)-광개토 대왕비(09:30)-집안 출발(11:50)-혼강 대교(渾江大橋 13:10)-호산시 장성(만리장성 시작점17:50-18:25)-호산장성 출발(18:30)-옥류관 도착(18:50-식사20:40)-의강 호텔(誼江賓館21:30)-압록강 夜景(21:30-23:10)-휴식 및 취침(23:15-06:00)
다섯째날 6/6 기상 및 조식(06:00-07:30)-압록강 유람선 승선(07:50-08:30)-압록강 선착장 출발(08:35)-단동-대련간 고속도로 들목 요금소(09:00)-대고산 휴계소(09:52-10:00)-대련시(12:35)-대련 고향가든(12:40-식사 13:15)-짝퉁점(13:30-14:15)-성해광장(14:30-15:00)-대련 공항도착(15:45)-비행 수속및 지연으로 미탑상(15:45-20:45)-탑승(20:50-이륙(21:00)-인천공항 도착(22:00 시차로 23:00)-수속 및 짐찾음(23:20)
첫날 6/2 대한민국의 국민이면 누구나 다녀오기를 염원하는 백두산이며 일년여전에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여 더욱원하던 백두산을 다녀오기로 마음을 다져오던중 '강학우'사장의 권유로 오랫동안 숙원을 풀게되어 마음가벼히 기쁜 마음으로 몇명의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다녀 오기로 하였으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친구들은 종주팀이 아니라는 것을알고 취소하였고 '김영환' 사장과 단둘이만 '강'사장의 체면을 생각하여 취소를 못하고 예정대로 강행을 하게되어많은기대와 설래임 속에부평 시장역에서 승용차를 내리며 가족들의 열열한 환송에 더욱들뜬 마음을 내실을 다지기위해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가이드 겸 인솔자인 부평의 '사래와'등산복 및 장비점의 '김'사장의 인사와 몇가지 유의할 점등을 듣고 20여명이 인천공항을 향해 즐겁게 발걸음을 내디뎓다.
예정된 시간보다 여유있게 인천공항에 도착하여'기러기투어'의 '문'상무와 일행이 합류하여 나온숫자를 확인후 수속을 마치고 30명이, 넘는 인원으로 예정된 시간에 여유롭게 탑승하여 차질없이 비행기내에서 간단한 기내식을 마치고 대련 비행장에 정시로 도착되었고...
국가가 다르고 체제가 달라 낯설어 어리둥절해 낮가림하는우리의 내심을 아는양해맑은 이른초여름의 날씨와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이 우리를 격없이맞아주는것 같아 나 또한 오랫동안 몸담았던 고국(한국)과 별다르지않은 친숙함으로낯설었던 마음은 곳 안심되었으며 또한 조금전까지의 생각이 기우(耆愚)였음을 깨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차장으로 나가 대기돼있는 관광버스를 승차하고 심양으로이동중 버스에서 현지 가이드인 '왕'씨와 '팽'양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인사를 받고 자기 소개와 각각 노래(반갑습니다등)를 하나씩해 초면임에도 스스럼없이 좋은 분위기로바뀌어 더욱 안심한 마음으로 창밖의 낯선 풍경을 만끽하며...
대련에서 심양까지 3년전에 개통됐다는 고속도로 370km의 거리를 4시간 40여분의 지루한 시간을북한에서 12살까지 살다 중국으로 유학와 현재 23세라는 젊은이의 중국내의 생활습관과 한국과의 다른 풍습등(어른과 맞담배 질을하며 심지어는 담배불도 어른이 붙여주며,더우면 웃통을 보통으로 벗고 거리를 걸어다니고 그대신 술은 절대 대작을 하지않는다는)등을 들으며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을 잠시나마 호기심을 자아내며...!
지금은 우리나라도 많이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유교의 창시자의 나라인 중국보다 월등히 예의가 바르고 뛰어나기에 중국을젖혀놓고 우리나라를 그전부터 동방 예의지국이라불리우게 된것같이 생각되어 이제야 이해할수 있을것 같다.
제례의 본류(유교)의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와제례의식을배워간다는 말을 전에 들었을때도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중국은 확실히 옛것을 잊고살았으며,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실사구시에 심취되어 상중 3년동안은 모든 벼슬과 자신의 건강과 가정사도 버려두고 부모의 산소에서 시묘 살이등을 하며 유교에 철저히 심취됐던 때가있었으며유교의 본국이라 불리는 중국은 사회주의와 문혁등으로 많이 퇴색되어그런면에서는 우리나라가 월등히 앞서있는 것이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대련에서 심양으로 가는 장장370km 긴거리의 들판은 좌우로 산이보이지 않을많금 광활한 대지였으며 그 들판은 메마른 돌밭일색으로 옥수수 밭이었고, 얕은 산이있었으나 나무가 없는 헐벗은 메마른 산이며, 밭둑또한 돌로 쌓았는데 잘잘한 납작납작한 돌로 얕은 성을쌓아 놓은것 같았고 칼로 시루떡을 잘라놓은 것처럼 보였다.
중국에 도착하여 첫번째 식사인 저녁은 중국의 산업도시이며 상해와 함께 해외 투자자가 가장많이 몰려있다는 심양에서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아리랑 식당에서 한식 소불고기로 기내에서 간단하게 때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숙소인 서심주점(瑞心酒店중국은 호텔을 주점이라?) 에들어 짐을풀고 이국의 첫밤의 야경을 즐기기위해 밖으로나가 택시(시내는 공통적으로대개 현지돈 8원 우리나라 돈으로는 약1000원)를 타고(언어가 안통함으로 가이드 대동) 조선족들이 경영한다는 노래방과 식당 차집등이 운집한 저녁 먹은 곳으로가 한시간전에 나갔던 곳을 찾아들어 고량주 150원(약2만원)과 안주130원(약만6천원)을 '강'김'등과함께 세명이 기분좋게 마시고 서심호텔로 돌아가 변화가 많은 하루였음으로 고단한 몸을 샤워로 피로를 풀고 단잠을 이루었다.
둘쨋날 6/3 중국에서의 첫밤을 지내고 아침일찍 날이 밝는것을 남보다 먼저확인이라도 하려는듯 먼동이 트이기전 잠이깨어 호텔창문에 드리운 커텐을 젖히고 먼산과 주변의 생활상을 조금이라도 더눈에넣어 오랫동안 간직하려고 살펴 보았다.
무역도시고 야간 조명이 휘황찬란한 심양은 용이 용트림을 하는냥 중국에서도 무섭게 발전하는 역동의 도시임을 전날저녁에 확인하였으나 뒷골목과 호텔뒤쪽은 남루한 저층의 낡은 건물과 경관은 그리밝아 보이지는 않았으며 앞의 몇십층 쁼딍과 아파트는 건립된지 얼마안됨(10년? 아니5-6년미만)으로웅장하고 가위눌릴 지경이었으나 뒷골목과 뒷면은 한국의 평범한 도시에도 못미치는 도시였다.
중국에서의 첫 아침이며 호텔식이어서 이국음식이기는 하나 식성이 그리나쁜 편이 아니어서 밑반찬을 준비않했는데 별걱정 없이 식당에 내려가 뷔페 음식임으로 한국의 누른밥식의 죽과 빵서너개를 가지고 먹었으나 간이맞지않고 반찬들이 입맛에 맞지않았으며 그전에도 그런줄은 알고, 예측은하였으나 예측보다식사가 더욱입에 맞지 않아점심때까지 참을걸 생각하여 억지로 먹은것이 소화가 잘되지않아 좀 고생하였다.
아침을 일찍먹고 고궁인 청나라의 황궁을 관람하기위해 여덟시에 청 황궁에 도착하였으나 08:30분에 입장권을 발매함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우리나라의 임금님 행차와 같은것을 청나라 황궁이었던 고궁앞을 지나는모의 황제행차 행렬을 관람하고(동영상 참조)시간을기다려 한시간여를 청황궁을 관람하며 사진과 동영상을 담은후 통화로 가기위해 첫날부터 타고 다녀 눈에익은 기사와 가이드등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심양 요금소에 들어(09:50)무순을 경유 혼강을 따라가면서도 시골길임으로 이곳도 수많은 옥수수밭이 있었고 중국에 인구가 많다고는 하나 들의 옥수수 밭에는 하나 둘씩밖에일하는 사람이 보일뿐어린이들도 그리많이 볼수없었다. 들에 농사는 모를 거의다 낸 상태이며 아직도 모를 내지않은곳도 있었으며 터밭에는 감자가조금 심어져있었고파가 쇠어 씨가 맻혀있는것이 있었고 주택은 빨간지붕에 세멘트 벽의 말집형의 일색으로 허술하기가 짝이없어 마굿간인지? 사람이 살고있는 주택인지? 분간이 가지않았으며 우리나라의 농촌에서도 흔히 볼수있는 TV안테나와 위성 안테나는 이곳에서는전혀 볼수없었음으로 TV도 없는지? 의문이다.
혼강을 따라 통화의 메아리(美阿里)등 한국식의 이름이있는 거리의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통화를 출발하여 무송과 백산을 지나 송강하로 가는도중 중국의 장백산에서 캐낸? 무연탄을 가득실은 30량이 넘는 화물차를 처음이자 마지막의 열차가 달리는것이 보였고북한과의 경계가 가까와 져서인지? 검문이 있었으며 차에 오르지는 않고 운전기사의 면허증인지? 신분증을 확인하며 버스에 부착된 대련에서 출발전 통행증으로 A4지에 대련시에서 발행하여 큼직한 둥그런 고무인과 도장이 찍힌것을 버스앞 유리에 붙인것을 확인하는것 같았음으로 현재도 여행 증명서나 통행증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송강하 지방 소도시에 도착하여 우리나라의 낡은 여관급에 도착(소도시임으로18:30)하여 아직 저녁먹을때 까지시간의 여유가 있음으로 한시간 동안 재래시장과 난장을 둘러보았는데...우리나라의 순대와 비슷한 것이있었으며 과일 수박,천도복숭아,방울토마토,야자,딸기,빠나나등의 과일이 많이있었으나 그고장의 것이 아니고 남방에서 온것인지? 수박도 우리나라것 보다 당도가 덜하였다.
마차가 있었으며 이곳에는 말갈족과 몽고족이 많아 농사도 말로 지으며 말이끄는 마차도 여러대 목격할수있었고 자동차는3륜차로서 우리나라 티코보다 작은 차도많았으며 다른곳에서도 우리나라 30-40년전에 보았던 3륜짐차를 볼수있었고 도심(대륜,심양,통화,단동)의 영업용 택시는 폭스바겐 회사가 만든 구형15년이상 됐음직한차였다.
이곳의 음식은 시골의 허술한 여관이어서인지? 음식이 더형편이 없었으며 건물도 낡아 수도물도 약해서 3층은 몇십분을 틀어놓아도 녹물이흘럿고 녹냄새에 양치질도 못할 지경이었으며 찻길은 포장은 되어있었으나 패인곳이많고 찻길과 건물사이는 흙이 드러나있어 흙먼지가 많이 이는 국경지대의 시골임을 여실히 나타내었으며 또한 음식은 더욱 질이떨어져서 저녁부터 입에 맞지않은 음식을이튿날 아침먹은것이 체했는지? 소화가 않돼 저녁에 야경을 나갔는데 배가아파 화장실에 갔으며 호텔에 돌아와서도 몇번 화장실에 드나들었다.
세쨋날 6/4 예정이 조금바뀌어 어제가기로 되어있던 백두산 등정을 오늘하기로 되어있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평소와 같이일어나,송강하를 07:30분 출발하여 숲이우거진 산다운 장백산(백두산) 밑을지나 장백산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장백산 입구에 도착 타고온 버스를내려 장백산 입구로 들어가 수속을 마치고(단체임으로 가이드가) 셔틀버스로 갈아탄후(08:30) 달리는 버스에서 유월임에도 골자기에 눈이쌓인 백두산을 올려다보며 30여분을 올라 화강암으로된 1342계단 밑에 도착하여 2300m가 넘고 천지의 수면이 세계의 최고높이라는 2200m가 넘는다는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향해 오르기 시작(09:20)하였다.
백두산은 16개 봉우리가 있으며 그중 7개는 북한이 9개는 중국이 차지했다 하며 제일높은 봉우리는 장군봉이고 이곳은 북한이 관리한다하며,1년중 일기가 좋지않은 날이 더많아 230여일이 기후가 않좋아 천지를 보지못한다 하여 비가올것 같아 가슴을 조이며 올랐으나 오를때 보다 기후가 더나빠져 안개로인해 천지분간 할수없었고 오르는 계단은 눈을 대강치웠으나 한곳은 2-3m가 넘는 눈이 쌓여있었으며 우측에있는 중국령의 표지석을 재빨리 디카에 담은후 좌측에있는 낙석주의 표지판을 확인하였으나 날씨가 좋지않고 천지분간을 못하도록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어 좌측의 봉우리를 오르는줄알고 앞장서 오르니 부평 사레와 '김'사장도 따라오고 일행인'김영환'친구도 따라와 10여분 오르는데 길이분명치 않아 의아해하는데 밑에서 중국말로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기에 잠시 멈추어있는데 뒤따라오던 두사람은 하산하자며 내려가고 또한 우리보다 여자와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오르는데도 어려울것 같아 하산하여 보니 오르며 본 군복 오바를 착용한 사람과 눈을치우던 젊은사람이 따라와 중국말로 오르면 안된다는 듯한 말임을 알았는데 그때올라온 가이드 한테 뭐라고하는지? 여러말을 하며 제제를하려 하였으나 가이드가 오르려다 도로내려왔는데 무엇이 잘못됐느냐며 항의하여... 말도 통하지않는마천루봉에 올랐던 세명은 사진을 찍는등 들은척도 안하고 딴전을 보니 제풀에 고만두었고 10여분 기다리며 천지를 보기위해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으나 기후는 찬바람과 안개가 몰려옴으로 천지는 보지도 못하고 벼르고 별러 중국을 경유하여 시간과 경제적인것을 투자하여 어렵게 갔는데 보람도 없이 돌아서며 서운함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중국령 표지석이 있는곳에서 천지를 볼수 있었는데 기후가 워낙 좋지 않아 유명한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한것이 내내 너무 아쉬운 마음 이었다.
장백산 입구에 셔틀버스로 도착하여 15분여를 숲길의 평지인듯한 곳을걸어 장백산 대협곡에 포함된 금강협곡을 내려다보니 검은 감자가루 반죽으로 인의적으로 조각해 놓은듯 정교 하면서도 웅장하고 오묘한계곡에서 물이흐르는 모습은 신비의 그 자체였으며,고개를 끄덕일만큼 흡족함을느끼고 민족의영산!! 역시!! 백두산이야!! 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으며백두산의 천지를 보지못한 서운함이조금은 위안이 되었고... 아니 백두산의 천지만보았드라면 더욱 금상첨화 이었음을...그나마 다행으로 아쉬운 만족감을 가지게 되었다.
국내의 한라산과 몇몇 유명산과 국립공원은 다 다녀 보았으나 정말 백두산의 금강계곡만한 곳은 없었음으로 와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통화에 도착하여 도심지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도착하여 종업원들의 마중을 받고 분위기도 있는곳에서 여정을푼후
야경을 만끽하기위해 공원에나가 일부는 발 맞사지를 받으러 가고 일부는 중국 제기도 차며 야간 불빛 밑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놀다 규모가 꽤큰 슈퍼에들어가 고량주 52도짜리 꽤 괜찮은 것을 안주와 함께 중국돈 140원을 주고 구입한것과 또다른 고량주 한병등 2병을 5-6명이 나눠마시고 몸이 좋지않아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잠이들어 단잠을 잤다.
넷째날 6/5 포도주의 주산지인 통화의 동산빈관(東山賓館)의 공기좋은 한적한 곳에서 하루저녁을 쉬고나니 한결 몸이 상쾌하게 가벼워져 창밖을 내다보며 백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포도주의 고장이라는 생각을하며 오면서 한두군데의 포도밭은 목격하였으나 주산지로서의 규모는 아닌것 같았으며...
방에서 단조로운 붉은색의 지붕과 세멘트 일색의 말집이라 칭하는 집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듯 유심히 바라보니 멀리의 집들에서 여섯시가 넘어서야 하나둘 가정의 굴둑에서 나무를 때는 연기를 내뿜는것을 보고 도시임에도 화목을 이용하여 생활하는 것을알수 있었고 오랫동안 사회주의의 사상으로 집단적으로 생활하고 개인의 재산을 인정 안하여 공동생활을 한결과로 집도 모양과 규모와 지붕과 벽의 색까지도같은 비슷 비슷한 집들인 까닭을 이해할수 있었고 들판의 옥수수 밭 일색으로 이루어짐또한 그유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통화를 출발하여 집안의 광개토 대왕비와 왕릉과 장군총을 관광하기 위해 집안시 옥녀봉 요금소(08:50)를 지나 광개토 대왕비에 도착(09:30)하여 광개토 대왕비 앞에서 단체 사진과 동영상을 담고 유리로 둘러쌓여있어 반사됨으로 사진이 잘담기지 않음으로 문으로 들어가 마지막에 나오며 한장만 담게 해달라 사정을 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여 겉에서 유리의 반사빛을 받은 사진을 집에돌아와 확인하며 원망스러운 생각이 다시 떠올랐고...
광개토 대왕비에는 1742자가 새겨져 있으며 현재 해석못한 글자가 142자라는 말을들어 알았으며 대일본 제국의 비라고 글자를 왜곡했으며 비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는것을알고 일본의 야비한 마음과 비양심적인 본심을 알게되어 또한번일제 강점기의만행을 뼈저리게통한으로닥아왔으며 광개토 대왕의 비와 왕릉도 우리나라의 관광객이 많이 관람을하고 딸라를 써주니 중국에서도 그만큼이라도 관심을 같고 자기내의 돈벌이를 위해 관리하여 관람료를 받는것임을 알았다.
이곳이 그옛날 우리 고구려의혼이 베인 우리조상의 땅이었음에 더 무엇을 말할수 있으랴!!
광개토 대왕릉은 동양의 피라미트 형의 묘로서 풀지못하는 숙제라하며,장군총과 가신의 묘의 고인돌도 특이하게 웅장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집안에서 점심을먹고 압록강에서 건너다 보이는 '북조선'의 집단 거주지와 허술한 스레트 집을 볼수있었으며 산봉우리까지 밭을 일구어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짖느라 애쓸생각을 하며 압록강을 건너다보니 집단적으로 모여사는 모습을 볼수있었으며 대체로 성분이 좋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말을듣고 산간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사는것도 성분이 좋고 애국자라야 하나? 하는 의문을지울수 없었고또한 말로만 들은 사실을 이북에서 살았다는 가이드에게서 소나무껍질을 벗겨먹고 풀뿌리를 캐먹었으며 93년부터 굶어죽은 사람이 숫자를 헤일수 조차없게 많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말을들으니 피부에 와닿아 숙연한 마음이었다.
혼강대교에서 단동까지는 215km이며 호산시에 도착하여 호산장성(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에 도착(17:50) 하였으며 (고려때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최영'장군의 명령을 거역하고회군하여 구대타를 하여 조선을 세운)건너다 보이는 위화도에는 또한 열성당원인 농부들이 거주한다는 말을들었고 시간관계상 호산장성에는 오르지 못하고 입구에만 관람하고 출발(18:25)하여 인구180만의 단동에 도착하여 북조선에서 경영한다는 옥녀관에(18:50) 도착하여 붉은색의 원피스의 유니폼으로 단장한 8명의 젊은 여자들이 차려주는 한국음식과 같은 반찬과 밥으로 한국을 떠난후 처음으로 차진밥과 입에맞는 찬으로 흡족히 식사를 마칠무렵 8명의 여자들이 돌아가며 전자올갠과 키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다함께 반갑습니다.고향의 봄등 많은곡을 합창하며 춤까지 추는등 흥에겨워 박수도 치고 팁도주는등 함께 사진도찍고 호흡이 맞아(같은 동포임으로 쉽게)흥에겨워 놀다 헤어지면서는 또만나요,를 노래하며 헤어졌다.
농산물 시장과 기념품 가게에서 참깨5kg(20000원) 검은깨(25000원)에 구입하였으며...
의강빈관(誼江賓館)에 도착(21:30)하여 압록강 야경을 구경하기위해 '김영환'친구와 함께 공원을 거닐다 배가아파 공원의 화장실을 중국50전(600원)을 주고 용변을 보았으며, 압록강 다리의 절반인 단동쪽은 불이 밝게비추고 있으나 북한쪽은 불이꺼져있었으며 밤에는 일체 오고가는사람은 물론 차량조차도 하나 없었으며 북쪽의 건물또한 불을밝히지 않은 암흑강산에두곳만 깜박깜박 하고 있었는데 멀리에 희미하게 불빛이 비치는 곳이 다름아닌 김일성의 동상 이라는 말을가이드로 부터 들었는데 그곳은 북한국민이 다굶어 죽어도 불을밝히며 90년 초부터 극심한 식량난에 북한국민들이 굶어 죽을때에도 불을밝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것이라는 곳이었다.
백성들이 굶어 죽는 암흑강산에 불밝힌 김일성의 동상이라..... 묘한 마음의 갈등과 왕조도 아닌 이상한 세습체제 아래서
먹는 본능 조차 해결해주지 못하고 충성만을 강요당하는 우리 동족에 마음의 한쪽이 아파오는 분노를 느끼며....
북한쪽의 어두운 곳을 다시한번 응시한후 아쉬움을 남기고 압록강의 단동 방파제의 문처럼 뚫린곳을 통과하여 10여분 걸어 숙소인 의강빈관에 들어와(23:10) 골아떨어져 단잠을 잤다.
다섯째 이번여행의마지막 날인 6/6 일아침에 단동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고 아침일찍 날이 밝는것을 남보다 먼저확인이라도 하여 더욱 많은것을 보고 가려는듯 먼동이 트이기전 잠이깨어 호텔창문에 드리운 커텐을 젖히고 먼산과 집들의 굴뚝에서 나오는 아침을 짖기위한 연기를 보며 50여년전의 어렸을적에 한국의 모습을 연상하며 중국도 이러할진대 북한은 오죽할것인가?하는 평소에 생각지 못한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고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한가를 깨닫게되었다.
여니 때와같이 일어나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압록강 선착장에서 초라한 유람선에 승선(07:50)하여 30여분을 압록강 교량근처를 돌아 북한쪽 가까이 접근하여 남루한 어부들이 장비도 변변치 않은 투망을 가지고 고기잡이 하는것을 목격하고 소리를 질러 인사를 하고 그쪽에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으며...
단동에서 대련까지 310여km를 가기위해 배를내려 선착장을출발(08:35)하여 고속도로 입구(09:00) 대고산 휴계소(09:52-10:00)를지나첫날 매마른 땅과 옥수수밭을 지겹게 보며 항구도시이며 1차 세계 대전시에는 소련에게 점령을 당하고 제2차 대전에는 일본에게 점령되었던 대련시에(12:35) 도착되어 100년전의 유물이 많이있어 100년의세월이함께 현존한다는 대련에 도착하여...
대련의 인구는 680만명으로 인천인구의 약3배가되며 중국의 전체인구는 약14억의 많은 인원이라는 말을듣고 우리나라의 약40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였으며 현재는 인구억제 정책으로 하나만 낳기정책임으로 중국도 우리나라에 못지않게 용의 여의주처럼 왕자나 공주 모시기와 같이 좋은것과 귀한것은 자녀들에게만 주고 부모는 자녀를위해 희생하는 예가 많다는것을 오래전부터 알았으나...
압록강변 시골의 좋그만 지방도시인 통화에 도착하여 점심을 기다리며 조금 시간이 남아시내를 둘러보다자전거를 타고온 사람과 오토바이를 타고온 사람등이 운집해있는것을 목격하고 가보니 그나라의 소학교(小學校) 앞이었는데 자녀들이 끝나면 데리고 함께가려고 학교앞에 기다리고 있는모습을 목격하여사실을 확인하였으며...
또한 그나라의 어린이들도 군것질을 즐겨하는 모습을 볼수있었고...
하수도 공사로인해 흐르는 물에 옛50-60년전 우리나라 빨래터에서 방망이질을 하며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볼수있었다.
대련의 고향가든에(12:40) 도착하여 한국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몇군데의 기념품 가게에 들렀으며(13:25-14:15)...
세계에서 가장넓다는 성해광장에 들러(14:30-15:00) 둘러보고 공항으로 출발하여...
공항에 여유있게 도착하였으나 입국(3시간전인 15:45)준비를 마치고 기다렸으나 인천에서 기후가 나빠 출항을 못하여 입국할 비행기가 없어 미리 보세구역에는 들어왔으나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고 2시간이 지난 시간에 남방항공인 해남도행 비행기를 대체하여 20:50분에 탑승하여 예정 시간보다 2시간도 넘어 출항하여 시차시간이 한시간임으로 23:00에 도착하여 짐찾고 입국수속을 하는등 시간을 보내어 집에는 01:00경에나 도착하여...
고단한 5일간의 중국관광과 숙원이었던 백두산 등정을 같이한 여러분의 도움과 협조와 조언등으로 우매한 본인도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되었으며 특히 기러기 투어의 '문용식'상무와 부평 사레와점의'김광식'사장의 많은 지도와 관심이 있었기에 고마운 마음을 본난을 통해 전하며 오랜 친구이며 산우인 '강'사장의 많은 관심과 도움에 고마운 정을느끼며 수원에서 오신 '심'선배님의 구수하고 좋은 입담은 오래도록 잊을수 없을 것이며 친구와 부부가함께 동행한 '박종문'사장님의 성함과 그일행 또한 같이 오래도록 잊지못할 것임으로 그외의 모든분들도 다 소중한 분들이었기에 오래도록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번의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으며 언제 또좋은 기회있으면 다시 만날날을 고대하며 준비가 부족하여 매끄럽지 못하고 미숙한 산행기를 마친다.
※장백산 :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희게 보인다하여 장백산이라 한다하며.
주점은:호텔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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